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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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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 김용희 교수 - 존재와 무
등록일 2020.01.23 조회수 3306

 

존재와 무

      


창밖을 넘는 공기가 서늘하다. 혼자 앉은 밤의 적막과 고독이 찬 공기만큼이나 무심한 냉냉함으로 창을 넘는다. 초가을 밤의 그림자가 길다. 티비를 이리저리 돌린다. 이런 저런 드라마들이 삶을 흉내내고 다양한 질문들을 무책임하게 던져놓는다.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들려고 삶의 극한 요소들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드라마란 이름으로 화면들을 채운다.  

그리 시간을 허무하게(?) 빼앗기고, 아니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적막은 더 대책없이 기다리니 그렇게라도 좋다.

우린 순간을 산다. 비오는 날 빗소리를 듣는 순간, 가을날 가로수 길을 걷는 순간, 맛난 저녁을 먹는 순간, 얘기 나누며 상대방에 집중하는 순간, 일하는 순간, 걷는 순간... 그런 순간들의 합이 삶이다. 그렇게 순간적 기억들의 궤적으로 시간은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순간을 산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마치 밤이 낮으로 여름이 가을로 그렇게 태초부터 영원까지 흐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인지기능의 착각말이지. 그냥 현재만 있을 뿐, 만일 시간이 흐름이라면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있을까? 단지 천제가 움직이고 있어 밤과 낮 여름과 겨울이 오고 가는 것일 뿐, 만물이, 우주가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일 뿐, 계절은 지나고 인간은 늙고, 지구도 그 지구상에 모든 생물도 흐르고 변할 뿐, 그러니깐 만물이 존재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멈췄고(없고) 만물이 흐른다. 어린 시절 시골 버스를 처음 탓을 때 가로수가 내게로 왔다. 버스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인간 인지 기능의 착각이다.

그러나 감성과 감정과 의식이 있는 인간은 그 의식이 작동하여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 믿고 변화의 룰(패턴)을 밝혀 시간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시간이라는 것을 개념화하고 그것에 인식과 감상을 덧입히고, 그렇게 되어 이 가을밤이 외롭다고 느끼는 것, 따라서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그 위에서 변화되어 가는 것들은, 모두 주객이 전도된 착각인 것이다. 실존의 무한의 변화 속에 감성과 이성과 인지기능을 가진 두뇌작용이 있는 개체들이 있을 뿐이다.

 

애시 당초 우린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 개체다. 왜냐하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니깐, 존재하면서 존재본질에 대해 질문을 하지만 피조물로서 피조의 대상 변화의 대상일 뿐, 때문에 그냥 즐거워하고 그리워하고 힘겨워하고 그렇게 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근거 없다, 이슬과 바람의 시간 위에서 바랄 것도 기댈 것도 남을 것도 없다. 이게 ''인가? 오온개공(五蘊皆空), 그 반야(般若)의 진리 말이지.

 

혹자는 말한다. 진리가 있고 길이 있고 구원과 영생과 영혼과...비록 그게 있다고 해도 알 수도 없으려니와 안다고 해도 그건 아는 것이 아니다. 앎과 모름의 차이도 없다. 그냥 추정만 할 뿐, 현자 원숭이... 그게 웃기는 얘기듯이.

인지기능? 인식기능? 그것도 소멸의 대상일 뿐인데, 역사 속에만 머물러 있는 종교의 창시자들? 그들도 그냥 머물 뿐, 그냥 역사일 뿐, 현재에 현시(顯示)하지도 영향력도 없다. ? 있다는 증거가 없다, 있다면 역사가 이리 괴상망측하게 되어왔을까? 왜 김정은이 우리 이천만 주민을 쥐잡듯이 통제할 수 있을까? 1.2차 대전 전쟁은 어떻게 왜 가능했으며 그때 그 신들은 왜 팔짱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무관심 무능력 그렇게 존재의미 없는 신들이라면 그건 뭔가?

 

진리란 것은 제도로 역사로 규율로 나아가 관념적 정의로만 존재한다. 그것들은 급기야 개인을 제도에 묶은 완전한 비합리의 근원이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신이 정한 법칙 운운하면서, 그런데 이제 인류가 자각하면서 결국은 그게 허상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현 시대는 모두가 개체화되고 실존적 존재가 된다.

즉 나는 나일 뿐, 누구의 예속도 특히 제도나 가치의 희생물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개인주의? 욕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각성하고 있다는 증거요 현상이다. 제도의 희생, 타인의 도구, 그런 원시적 사회가 좋았었다는 건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한 결과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탄의 유혹이라고? 그런 것은 잘 모른다. 역사 속에 나타난 사실들을 엮어보면 정의, , 진리 이런 것이 안 보일 뿐.

 

너무 냉소적인가? 아님 비관적인가? 니체, 칸트, 헤겔을 감히 흉내처럼 낸다고? 가련한 불신자 허무주의자라고? 허무주의? 그게 근거 없는 세뇌보다는 낫겠다. 어떤 분이 기도 중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그건 분명히 인간에게 내재된 초 기능적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유리겔라가 숟가락 구부리는 건 온 국민이 따라했다. 종교 아니다. 그게 곧 신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원시종교다.

관념의 나열이다. 감히 반야(般若)와 공()을 어찌 알랴! 그래도 착각, 허상, 가치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얕은 몸부림이긴 하지 않을까.

 

 

문학공간, ‘사색예찬 

·문예창작학과 김용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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