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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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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 김용희 교수 - 일체유심조
등록일 2020.04.03 조회수 3290

 

 

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란다. 
특이한 사례들만 취재해서 방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어떤 사람을 소개한다. 물만 마시면 토하는 이가 있어 탄산음료만 먹고 살았단다. 그래서 아직 중년인데 건강은 이미 노년이 되었다. 그러나 심리치료하면서 먹어보니 물 마시는 것도 가능하다. 물을 먹으면 토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정해놓고 그것을 따른 것일 뿐이었다.

 

노년이 되어가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친구들이 있어 부러워들 한다. 골프치고 기부도하면서 삶을 여유롭고 즐겁게 사는 친구들, 중장년의 모임, 사실 어떤 모임이든 모임은 은영 중 자신의 것들을 자랑하고 또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자식 잘 키워놓은 것이든, 어릴 적 혹은 젊은 시절 뒤쳐진 듯 보이든 친구가 저만치 앞서 있었다. 은연중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좌절한다. 마음의 작용 곧 욕망이다.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한다. 복에 복을 더하기를 원한다. 자손이 번성하고 권력이나 자산을 많이 쌓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산다. 성경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에 복을 더하겠다”고 축복하던 하나님, 신약에서 예수는 젊은이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서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친구와 친지들도 모이면 서로 비교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재산이 얼마인지? 자식들이 무엇을 하는지? 노후는 준비되어 있는지? 풍족한지? 혹은 빈 깡통인지. 아직도 잠시라도 일손을 놓으면 생계가 막연하거나, 자식들이 홀로서기도 못했거나 자존, 존재감, 여유, 경제력, 그 다복함이 경쟁되지 않을 수 없다. 늙거나 젊거나 특히 앞으로의 희망이 적은 중장년은 그렇게 현재 가진 것 만으로의 욕망으로 산다.

 

그런데, 이런 것 추구하지 않는 분들도 있었다. S대학교 주임교수시절 사회과정을 운영할 때 금융권 연합회 회장하시던 분이 계셨다. 그분은 집이 없다고 했다. 집을 일부러 가지지 않는다 했다. 부실채권 정리하면서 부를 탐내면 얼마든지 축재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교수라는 직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존경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사실은 그 ‘존경’이라는 것도 일종의 욕망일 뿐인데. “과욕은 화를 부를 수 있다”고. 자족(自足)지심. 누구나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 탓인데, 잘된 것을 남 탓, 잘못된 것을 내 탓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난사람이다.
사는 것이 자의적으로 되던가? “다 팔자이니 너무 애쓰지 말라”는 선배의 말씀은 항상 참 같다. 우연히 문제가 생기고 우연히 기회가 온다. 부당이득을 보면 꼭 그만큼만의 손실이 발생하기도 한다.


타인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는 이미 성인이다. 자족할 수 있으면 이미 그는 인격이 된 사람이다. 그들은 이미 자족의 평안을 아는 분이다.

능력이 있어 성공한 이들은 그들의 삶을 산다. 갑자기 친구나 동료가 사장으로 부임하거나 상관으로 조직 편재되어 그의 부하직원이 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도 세상 삶이다. 이전 회사 사장이 그랬다. 고등학교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잘하던 친구가 사장이었고 유명대학 간 친구들은 상무, 전무가 되었다. 그 당시 당당하던 전무는 그 후로도 사업을 해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좀 욕 잘하는 해운 사장은 구속되고 사업도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가 그랬고 라캉(Jacques-Marie-Emile Lacan)이 그랬고 다산(茶山丁若鏞)이 그랬다.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서양식 자본주의는 욕망 위에서 있다. 사람은 욕망으로 산다. 욕망으로 살 일이다. 괜히 욕망이 없는 척, 세속의 욕심을 버린 척 그리 살지 말 일이다. 그것은 가식(假飾)이 될 수 있고 허위가 될 수 있고 속임수가 될 수 있다. 부러운 것은 부러워하면서, 욕심낼 것은 욕심내면서,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으로 살 일이다. 권력과 부와 여유와 명예와 지위와 그렇게 한 삶을 얻었으면 욕망따라 인간답게 살 일이다. 종교를 가진 분들 중 안면(顔面)이 낮아서이겠지만 욕망을 제어한 이를 보지 못했다. ‘바람처럼 물처럼’ 사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 스님, 신부, 수녀... 그들은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고 사시는 분들이라 속세인들의 청량제가 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우는 분들이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모두가 수녀가 되고, 신부가 되고, 스님이 되면 세상은 끝날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인간은 종족도 번식시키고 경제도 발전시키면서 욕망으로 살아야 인간 고리인 사회가 형성된다.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선생이 스님 결혼제도를 주창한 것도 이런 의미로 보인다. 원효元曉)대사도 요석공주와 결혼해서 설총(薛聰)을 낳았고.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는 분들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것만이 참가치는 아닐 것이란 얘기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배우자, 부러워하며 살 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에 복을 더하는’ 세속적 욕망을 주었지만 예수는 젊은이에게 ‘네 소유를 다 팔라’고 했으니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가지면서도 놓아야하는 것,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것, 소유하데 빠지지 않는 것, 잡지도 놓지도 않는 것, 산다는 것이 묘미있는 것이 그렇게 과정으로 살기 때문에, 최소 자신을 속이지만 않을 수만 있다면 삶의 정답 혹은 길을 없겠다. 취하고도 버리고, 실수하면서 가는 것 아닐까.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즉 차별심,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던 조오현 스님의 시 한 수 소개한다.

 

 

-산거일기-  조오현

솔밭을 울던 바람은 솔밭에서 잠이 들고
대숲에 일던 바람은 대숲에서 순한 숨결
저 하늘가는 저 달은 허심(虛心)하니 밝을 수밖에

 

 

 

문학공간, ‘사색예찬’ 

웹·문예창작학과 김용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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